어릴 적 크레용을 손에 쥐면 세상이 나의 도화지였다. 벽, 책, 심지어 바닥까지도 낙서판이 되었던 기억. 하지만 언젠가부터 크레용은 '어린이용' 도구가 되었고, 낙서는 '쓸데없는 짓'이 되었다. 그런데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다시 크레용을 잡고 싶어졌다. 단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도해봤다. 어른이 되어 다시 시작한 ‘낙서 놀이’. 결과는 생각보다 더 진지하고, 더 유쾌했다.
1.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1-1) 크레용 한 상자, 동네 문구점에서
퇴근길 들른 동네 문구점에서 크레용을 집었다. 진열대 맨 아래, 어린이 그림책 옆에 놓여 있던 작은 24색 크레용. 가격은 고작 2천 원 남짓. 포장을 뜯자, 특유의 왁스 냄새가 났고 색색의 단단한 심들이 빛났다.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1-2) 낙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처음엔 뭘 그려야 할지 몰라 하얀 종이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런 어색함, 참 낯설다. 어릴 땐 고민이 없었는데. 그래서 그냥 손 가는 대로 그렸다. 동그라미, 별, 무지개, 알 수 없는 괴상한 형체들. 그 모든 것이 정답이었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선을 그리는 그 감각, 색을 채우는 그 행위 자체였다.
1-3) 비워내기 위한 낙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들었던 짜증 나는 이야기, 회사에서 있었던 오해, 무의식 중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 줄, 한 줄 색칠할 때마다 조금씩 녹아내렸다. 나도 몰랐던 감정들이 크레용 끝에서 풀려나오는 듯했다. 어른이 되어버린 마음을 정리하기엔, 말보다 낙서가 더 유효했다.
2. 낙서하는 동안 일어난 변화
2-1) 멍 때리기와 집중 사이
크레용으로 낙서를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핸드폰도 안 보고, TV도 안 켜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색칠하는 시간. 그건 멍 때리기이면서 동시에 집중의 시간이었다. 생각은 잦아들고, 오직 선과 색에만 몰입하게 된다. 하루 중 이렇게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귀했던가를 새삼 깨달았다.
2-2) 감정이 색을 고른다
어떤 날은 빨간색을 자주 썼고, 어떤 날은 파란색만 찾았다. 감정이 손을 이끈다는 걸 느꼈다. 단순해 보이는 낙서지만, 그 속에는 지금의 내 기분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나는 왜 오늘 초록색을 이렇게 많이 썼을까?’ 낙서 끝에 그렇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도 따라왔다.
2-3) 표현력보다 솔직함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지만, 곧 내려놨다. 낙서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니까. 오히려 그랬기에 더 솔직하게 그릴 수 있었다. 어떤 규칙도, 평가도 없다는 사실이 자유로웠다. 한 장, 한 장 완성될 때마다 ‘괜찮아, 이대로도 좋아’라는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3. 낙서 이후의 변화와 새로 만든 루틴
3-1) 스트레칭보다 효과적인 마음 이완
의외였던 건, 하루 15분 낙서가 스트레칭보다 더 마음을 풀어줬다는 점이다. 특히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조용히 종이 한 장을 채우다 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곤 했다. 심지어 잠들기 전 낙서가 수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디지털 없이 색과 종이만 있는 그 시간이 작은 명상 같았다.
3-2) 작은 변화가 주는 만족감
낙서를 시작하면서 종이와 색연필, 수채화 붓펜도 구비했다. ‘미술’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표현’이라고 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생각보다 삶의 밀도를 바꿔놓았다. SNS 대신 낙서, 넷플릭스 대신 크레용. 그 작은 선택이 하루를 더 나답게 만들었다.
3-3) 주말 오후는 낙서 타임
지금은 ‘주말 오후 한 시간은 낙서 시간’으로 정했다. 커피 한 잔 놓고 음악을 틀어두고, 천천히 크레용을 꺼낸다. 친구들에게는 ‘아트 테라피 타임’이라고 자랑처럼 얘기한다. 가끔은 친구와 함께 낙서를 하기도 한다. 웃기고, 유치하지만, 끝나고 나면 꽤 든든한 여운이 남는다.
마치며
어른이 되어 다시 잡은 크레용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내 마음의 온도를 살피는 감정계였고, 나만의 치유 시간이었다. 잘 그리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해주는 색깔의 언어. 낙서는 어쩌면, 어른에게 가장 필요한 놀이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방 책상 한쪽에는 크레용 한 상자가 늘 놓여 있다. 지치거나 답답할 때, 그걸 꺼내 하얀 종이를 채워보곤 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나 찾기’ 방법이 되어주었으니까. 혹시 지금 마음이 복잡하다면, 크레용 하나 꺼내보시라. 그저 낙서일 뿐인데, 생각보다 많은 게 풀릴지도 모른다.